Abstract
김석문이 생존했던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 조선 학계는 예론 중심주의, 주자 중심주의가 주류를 이룬다. 16세기에는 조선조 대부분의 학자들이 가담했던 사단칠정론과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새롭게 등장한 인물성동이론이 조선 학계의 주된 담론들이었다. 당시의 주자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연구보다는 이기심성론이나 예설에 천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김석문의 관심은 자연에 있었으며, 그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그 이후 조선 학계 관심의 지평을 넓히는 데 공헌을 했다. 이런 자연의 복권은 김석문의 「易學二十四圖解」에서 잘 드러난다. 김석문의 자연에 대한 관심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太極圖說」의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다. 김석문은 太極→陰陽→五行→萬物의 도식을 포기하는데, 이로써 태극과 음양, 오행, 만물의 연결고리는 끊겼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음양’과 ‘동정’은 재해석되는 과정에서 만물의 변화 법칙의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데, 태극이 만물을 관여(또는 주재)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태극이라는 우주의 궁극적 근원이 지상의 만물에 관여할 수 있는 통로와 방법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셈이다.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구성하고 있던 「太極圖說」은 김석문에 와서 서양의 자연과학적 지식과 충돌을 일으키며 변화를 겪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것이 가지고 있던 만물의 생성론적 원천의 지위는 약화되었고, ‘동정’과 ‘음양’이라는 변화 원리도 효력을 상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석문은 ‘태극’이 가지고 있던 형이상학적 속성을 완전히 폐기할 수는 없었다. 주희와 마찬가지로 김석문은 여전히 태극을 리로 보고 있다. 김석문은 리의 부동성을 강조하면서 리가 만물을 주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김석문은 조선 후기 자연의 경험주의적 이해의 새로운 서막을 여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지만, 완전히 성공했다고 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