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글은 조선 후기에 편찬된 대표적 병서와 지식인들의 논의를 중심으로 병학사상을 살펴본 것이다. 조선은 개국 이래 200여년의 태평성대를 구가하다가 양대 戰亂을 거치면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조선 병학의 한계를 각성하였다. 柳成龍의 『懲毖錄』에 반영된 倭賊에 대한 대비책과 전란의 경험은 후기 병학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초의 병서에는 이에 대한 대비책이 별도로 제시된 일이 없었다. 한편 선초의 陣法 논쟁과 마찬가지로 후기 병학의 정립과정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임란 직후 明나라 군대를 통해서 척계광의 『紀效新書』와 『練兵實紀』가 유입되었는데, 처음에는 원본 내지는 초록본의 형태로 군사훈련에 활용되다가 후에 『兵學指南』과 『練兵指南』으로서 출간되었다. 이 책들은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왜구와 북방 오랑캐를 대응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선초 이래의 오위진법과 상충되기도 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형이 차이가 있으므로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英朝⋅正祖 때에는 『續兵將圖說』, 『兵學通』, 『兵學指南演義』, 『武藝圖譜通志』 등 조선 후기의 대표적 병서를 출간함으로써 군사훈련의 통일성을 기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당시 논쟁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해명하였으며, 이로써 선조 때부터 200여년 지속된 논쟁은 종료되었다. 조선 전기와 후기의 병학적 특징을 개괄하자면, 선초에는 『武經七書』를 바탕으로 文臣의 주도하에 병학의 倫理化가 진행되었다면, 후기에는 『기효신서』가 계기가 되고 상대적으로 다수의 武臣이 논쟁에 참여하면서 병학의 實學化가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조선 병학의 정립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世祖와 正祖인데, 양자는 모두 왕위계승 과정이 순조롭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은 정치 행위의 연속이다”라는 명제가 생각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