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이 글은 ‘인권의 철학적 근거’, 특히 ‘인권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관한 기존 논의의 철학적 근거’를 윤리철학 및 정치철학 측면에서 검토한다. 이 글의 주요 논지는, 인권이 여전히 역사현실에서 소중하지만, 인권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관한 기존 논의의 철학적 근거가 다음과 같은 치명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고 그 결함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점이다. 기존 인권 논의 속에는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대한 ‘정의(正義, 올바름)의 기준들’이 마구 혼재하거나 그 추상성이 너무 높다. 물론 이러한 인권을 역사현실 속에 잘 결합할 수 있도록 다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재해석한 그것은 인간의 다양한 욕구를 달리 표현해둔 것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거나, 심지어 물리적 세력의 법적 정당화 수단으로 이용당할 가능성이 크다. 기존 인권 논의 속에 담겨 있는 ‘정의의 기준들’이 혼재하거나 그 추상성이 너무 높을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좋은 삶’이나 ‘삶의 좋음’에 관한 구체적인 해석과 표현에 의해 뒷받침되어 있지 않고 있고, ‘좋은 국가’나 ‘사회적 좋음’에 관한 구체적인 해석과 표현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점은 근대 개인권리가 ‘좋은 삶’과 ‘좋은 사회’에 관한 비전에 의해 어느 정도 뒷받침되었다는 점과 비교된다. ‘주체적 삶’이 곧 ‘좋은 삶’이고, ‘사회 구성원들 각자가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사회’가 곧 ‘좋은 사회’라고 하는 일종의 ‘좋음’에 관한 구체적인 해석과 표현에 의해 근대 개인권리가 뒷받침되었던 반면에, 현대 인간권리는 ‘좋은 삶’이나 ‘좋은 사회’에 관한 그 어떤 비전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 이 근원적인 원인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기존 인권 논의 속에 담겨 있는 정의의 기준들이 혼재하거나 그 추상성이 너무 높을 수밖에 없고, 기존 인권 논의는 ‘인간 욕구의 정당화 논리와 그 인정 투쟁’으로 변질될 소지가 높으며, 심지어 적나라한 ‘물리적 힘의 어용과 그 주종 계약’으로 전락할 가능성 또한 아주 높다.